스토리

Life2023-09-22

자동차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④ 벤틀리 편 : 레이싱에 진심을 다하다


1919년에 창립된 벤틀리(Bentley)는 아우디, 람보르기니와 동일하게 창업자 W.O.벤틀리(W.O.Bentley)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하지만 브랜드 모델명을 짓는 방식은 다른 브랜드와 차이가 있습니다. 폭스바겐은 바람과 동물, 아우디는 숫자와 알파벳, 그리고 람보르기니는 투우와 황소를 주제로 하였지만, 벤틀리는 모델마다 독립적인 모델명을 선보였기 때문입니다. 독보적인 길을 걷고 있는 벤틀리 모델명들을 하나씩 살펴보시죠!


‘빠른 차’에 대해 진심이던 리터(litre) 시리즈와 뮬산(Mulsanne) & 아르나지(Arnage)

W.O.벤틀리는 청년 시절 사륜 오토바이를 구입한 후 레이싱에 푹 빠졌습니다. 경찰관들이 속도 제한을 하지 않는 이른 아침마다 레이싱 연습에 몰두하였고, 종종 레이싱 대회에 출전해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오토바이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링 실력 역시 향상되었죠.

이처럼 레이싱 마니아였던 W.O.벤틀리는 회사를 설립한 후 자신의 경험을 살려 레이싱 모델을 출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벤틀리 최초의 자동차 3리터(3-litre)는 1919년 런던 모터쇼에서 첫 공개되어 1921년부터 1929년까지 생산되었습니다. ‘3리터’라는 모델명은 엔진 배기량이 3리터라는 직관적인 의미였는데요. 장시간 고속 주행에 특화된 내구성을 무기 삼아 1924년과 1927년에 르망 24시 대회*를 포함한 수많은 레이싱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빠른 차, 좋은 차, 최고의 자동차’로 정상에 오른 벤틀리는 영국 왕실과 상류계층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레이싱 경기


W.O.벤틀리는 ‘속도는 배기량에 비례한다’라고 믿으며 엔진의 부피를 계속 키워갔습니다. 자연스럽게 리터 시리즈 역시 ‘4.5리터’, ‘6.5리터’, ‘8리터’ 순으로 신모델이 등장합니다. 이 중 전설로 남은 대표 모델은 ‘6.5리터 스피드 식스(Speed Six)’ 모델입니다. 1928년에 출시된 스피드 식스는 1929년과 1930년에 걸쳐 르망 24시 대회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929년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할 때는 이전 기록을 46초나 갱신하며 관중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W.O.벤틀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모델은 ‘8리터’였다고 합니다. 그는 8리터를 자신의 최고 역작으로 생각하며 직접 운전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만약 오늘날 42리터짜리 항공기 엔진을 장착하고 질주하는 레이싱 차량*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벤틀리 패커드(Packard): 벤틀리 8리터 섀시를 기반으로 개조된 일회성 레이싱 차량


레이싱을 향한 벤틀리의 열망은 다른 모델명에서도 드러납니다.

1980년에 출시한 대형 세단 ‘뮬산(Mulsanne)’은 르망 24시 '라 사르트 서킷(Curcuit de La Sarthe)’의 직선주로 '뮬산 스트레이트(Mulsanne Straight)'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2003년에 출시한 ‘아르나지(Arnage)’의 모델명 역시 르망 24시 코스명에서 가져왔는데요. 르망 24시 90도 좌회전 구간인 '아르나지 코스(Arnarge dans la Course)'에서 경쟁자들을 제친 것을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스페인 그란 카나리아 섬의 심장, 벤테이가(Bentayga)

2015년 디트로이트 오토쇼에서 럭셔리 SUV 벤테이가의 모델명이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벤테이가의 모델명은 스페인의 그란 카나리아 섬(Island of Gran Canaria)에 위치한 로크 벤테이가(Roque Bentayga) 암석의 이름을 본떴는데요.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로크 벤테이가가 자리 잡은 섬 중심부 일대를 성역으로 생각하며 다양한 유적을 남겼습니다.

벤테이가가 로크 벤테이가처럼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모델이 되기를 바랐던 걸까요? 당시 벤틀리 CEO였던 볼프강 뒤르하이머(Wolfgang Dürheimer)은 벤테이가의 모델명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벤테이가’라는 모델명은 벤틀리의 SUV 모델이 전 세계 SUV 중 가장 우월함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벤테이가는 최고의 럭셔리함과 뛰어난 성능으로 탑승자에게 새로운 차원의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벤테이가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벤틀리 라인업 중 가장 많이 판매된 모델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특히 2022년에는 벤틀리 전체 판매량의 42%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럭셔리 SUV임을 입증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가문으로부터 영감 받은 플라잉 스퍼(Flying Spur)

벤틀리의 대형 세단인 플라잉 스퍼(Flying Spur)는 2005년에 출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958년에 S1 컨티넨탈 플라잉 스퍼(S1 Continental Flying Spur)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영국의 문장학*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당시 H.J뮬리너의 상무이사였던 아서 탈보 존스턴(Arthur Talbot Johnstone)은 고대 스코틀랜드 클랜 존스턴(Clan Johnstone)의 가문 문장에 묘사된 ‘플라잉 스퍼’에서 영감을 받아 모델명을 정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위상에 힘입어서일까요? 플라잉 스퍼는 3억 원 이상의 국내 법인 등록 차량 중 1위**를 차지하며 독보적인 지위에 올라섰습니다.


*문장의 기원 · 구성 · 구도 · 색채의 상징 등을 연구하여 중세 사회 문화사를 해명하는 학문
**2022년 12월 기준


광활한 대륙을 질주하는 컨티넨탈 GT(Continental GT)

컨티넨탈 GT의 컨티넨탈(Continental)은 ‘대륙’을, GT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er)를 의미합니다. 컨티넨탈 GT 모델명에 관해 설명하기에 앞서, 컨티넨탈 GT 모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인 그랜드 투어(Grand Tour)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7~18세기, 새로운 경험을 위해 유럽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상류층 자제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습니다. 그랜드 투어에 나선 이들을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라고 불렀는데요. 장거리 여행을 상징하는 용어가 된 이 단어는 훗날 '장거리 운전을 목적으로 설계된 고성능 스포츠 자동차'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모델명에 붙는 ‘GT’는 ‘그랜드 투어러’의 약자입니다.


벤틀리 컨티넨탈(Continental)의 첫 모델인 R-타입 컨티넨탈(R-Type Continental)은 1952년 출시되었습니다. 당시 영국에는 고속도로가 없었기에 운전자들은 유럽 대륙의 개방된 도로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요. 벤틀리는 이 점에 주목하여 ‘광활하고 넓은 대륙을 질주하는 자동차’라는 의미를 담아 ‘컨티넨탈(Continental)’이라는 모델명을 확정했습니다.
최대 4인까지 탑승 가능하며 시속 161km로 달릴 수 있는 유선형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한 자동차 잡지는 R-타입 컨테넨탈에 ‘현대판 매직 카페트’라는 별명을 붙이며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며 출발할 때 느꼈던 새로움을 계속 느낄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GT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벤틀리가 다음에 선보일 차량은 과연 어떤 모델명으로 출시될까요? 그간 선보인 모델명에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예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모델명으로 출시되든 ‘빠른 차, 좋은 차, 최고의 자동차’일 거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모든 벤틀리의 모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우리가 벤틀리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